아버지의 계속된 두집살림 명절 외도...
섣달 스무아흐렛날 밤...
큰누님은 저녁 때 씻은 쌀을 큰 그릇에 담아 머리에 이고
동네에 있는 방앗간에 떡하러 간다.
누님의 뒤를 따라 방앗간에 같이 가 여러가지 재미있는 구경꺼리를
구경하는 것도 설을 앞둔 나의 빼어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방앗간 내부도 분주하다.
이미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순서 기다리는 외부 만큼이나.
커다란 원동기는 텅텅거리며 굉음 내며 돌아갔고 원동기의 피댓줄과 이어진
대여섯개의 분쇄기는 하얀 쌀가루를 내뿜는다.
어두컴컴한 방앗간의 한 켠에선 쌀가루가 뜨거운 김에 쪄진 채
커다란 4각쟁반에 담겨나오고 있다.
방앗간 종업원인지 주인인지 모를 50대의 아주머니는
동그란 성형압출기에서 이어져 나오는 떡을 계속 잘라내고 있다.
갓 나온 뜨끈한 가래떡을 가족의 누구보다 먼저 한입 베어먹을 수 있는 것도
방앗간에 따라갔기 때문에 얻는 특혜였다.
이 때문에 엄마이고 누나이고 가리지 않고 방앗간 졸랑졸랑 따라간 것 아닌가?
그믐날 저녁...
연탄 아궁이에 걸린 큰 솥에선 이미 쇠뼈국물이 뽀얀 빛을 내며 설설 끓는다.
어머니와 두 누님은 둘러 앉아 바삐 만두를 빚는다.
바쁜 모녀들의 사이를 들락거리며 그녀들에게 핀잔 들어가며
한숟갈 냉큼 집어먹는 만두속도 더 할 수 없는 묘미였다.
그렇게 들락거리다가 방바닥에 가득 빚어놓은 만두를 실수로 밟으면
뭉그러진 만두는 설날 아침 나의 차지가 되곤 하지만...
그 시각 즈음...
아버지는 벌써 청량리에서 오후 6시 열차를 타고
경기도 양평군의 양수리에 있는 큰 댁에 귀성차 내려가셨다.
큰댁에는 일흔이 넘어 여든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가 계셨고
설날 아침 조상께 차례를 지내기 위함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설날과 추석의 외도(?)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듬해인
1975년까지 계속 되었다.
설날 아침...
팔자 아니게 명절과부(?)이신 어머니께 형제들은 세배를 드린다.
그나마 우리가 더 어렸을 때는 세배를 드릴 수 없었다.
설날 아침 혼자 절 받는 어머니의 모습,
본인이 느끼시기에 안쓰러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안계신 아홉식구들이 둘러 앉아 한상 잘 차려진 떡국을 먹는 것이
설날 아침의 우리집 모습이었다.
설날 저녁...
큰댁에 가셨던 아버지가 제사음식과 설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돌아오신다.
그것도 폭설이라도 내리면 하루이틀 늦어지시기도 했다.
이렇게 아버지 없는 설날아침은 좀 썰렁하기도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설을 지냈다.
그래서인지 설날에 아버지의 역할은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께 세뱃돈 받아보지 못한 것이 이내 아쉬웠을 뿐...
한 세대가 지난 지금,
설을 비롯한 명절에는 내가 이 땅위의 맏이인 관계로
형제들이 모두 우리집에 모인다.
설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우리 형제는 찬양과 함께 설날예배를 드린후
이른 아침식사 후 남자들은 모두 양수리 큰댁으로 간다.
큰댁에서 지내는 설 차례와 부모님, 조부모님의 성묘를 위해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green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