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世上萬事)/가족 이야기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

green green 2008. 11. 6. 20:51

옛날, 1950~60년대의 이야기, 8남매 중의 다섯째로 세상에 나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나의 어머니는 다른 친구들의 엄마보다 훨씬 늙으신 편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엄마는 젊고 예쁜데 비해 하루종일 시장에 나가 가게를 운영하는 어머니는
그 엄마들 보다 연세가 훨씬 들었으니 그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학교에서 중학입시 등으로 어머니 오시라고 하면 웬만하면 어머니께 전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출생지는 서울, 일제치하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두해 전인 1917년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마른내길 근처에서 태어나셨다.
지금은 없어진 방산초등학교와 서울기술예능학교 졸업하신 어머니는 당시의 인텔리셨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어머니셨지만 "여자가 더 공부해 뭣에 써?" 하는 한마디 외할아버지의
완고한 역정으로 험한(?) 시집의 길로 들어서야 했다.

그 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로 시집을 오게 되었고 이 때부터 운명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아버지와 결혼, 신접살림을 아버지의 고향집이며 시댁인 현재의 팔당공원묘원
들어가는 길목인 양평군 부용리에 차리셨다.
뾰족구두와 타히트 스커트에 양산 받고 그 동네 방문한 제1호 신여성으로 기록되었지만
어머니는 유교 숭상하는 전통적인 집안의 며느리로써 신혼생활 자체가 고생길이이었다.

일제 말기에 결혼한 어머니와 아벼지는 6.25가 끝나고 고향에서의 사업을 접고 상경하시게 된다.
6.25기간동안 고향에서 많은 재산을 잃고 서울로 이주, 아버지와 어머니는 열심히 사셔야 했다.
크게 어려운 시기, 우선 사는 것이 다급했던 시기였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 만10여년이 지난 1964년, 내 위로 4명의 손위 형제자매가 있었지만
내 밑으로 세 동생이 더 태어나 우리 식구는 10식구가 되었다.

그때 우리집은 동기간들이 나를 포함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6명의 학생들이 있어
일하러 나간 부모님들 대신 위의 형이나 누이들이 학부모역할을 하던 시기.
실제 나부터 아래 동생들은 큰 누나 등에 업히며 그 보살핌 속에서 켰다.
당시 토건업에 종사하셨던 아버지는 5.16이후 국토개발의 붐에 따라 전국방방곡곡을 돌며 일 하시느라
집에 계시는 날수가 적었다.

충주 비료공장, 신갈 인터체인지, 팔당 수력발전소 등등 당시에 완공된 많은 시설물들이 일부 참여하신 공사였다.
어찌 된 일인지 공사가 끝나도 아버지는 돈을 벌어 오지 못했다.
오히려 임금 못받은 현장 근로자들이 우리집에 몰려 와 농성을 하다가 옷가지,
가재도구 등 세간살이, 나중엔 숟가락마저 집어가곤 했다.
그러기를 두어차례, 이제 집안에 남아 있는 것은 솥단지도 양은 밥그릇도 숟가락도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에서 살림을맡은 여자들에게 집안의 세간살이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재산, 결혼할 때 세간살이는
대부분 여자들의 몫이니 더욱 그렇다.
그런 세간살이가 집안에 숟가락 하나 남아나지 않은 현실을 겪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으랴.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어머니는 북받치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셨지만 소리내어 우시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