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1975년 3월 처음 만난 그 친구의 성(姓)은 변씨였다.
성씨가 춘향전에 나오는 변학도와 동씨라서 그런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훤칠한 키 하고, 무언가 일을 낼 것 같은...
어쨌든 인상이 깊었던 녀석이었다.
첫인상에서부터 뭔가 큰 일을 낼 것 같은 그 친구는 아니나 다를까? 그와 처음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일을 내고 말았다.
오리엔테이션 받으려 대강당에 모인 신입생들 틈에 누군가 유별나게 떠드는 목소리가 큰 녀석들이 있었다.
바로 뒷 자리에 앉은 내 시선이 저희들의 뒤통수에 꽃히는 줄 모르고, 두 녀석은 술 이야기를 화두로 계속 떠들고 있었다.
한 녀석은 키가 1미터 90센티는 될만한 키다리, 그 키에 걸맞는 길쭉한 얼굴에 돗수 높은 안경을 걸쳤으며
또 한녀석은 보통 키에 겁 많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녀석과의 첫 만남이었다.
며칠 후 첫 강의가 있던 날 방과후, 나를 알아본 녀석은 악수를 청하면서 제대로된 통성명이 이루어졌고
"그래, 첫날인데 술 한잔 해야하는 것 아뉴?" 하며... 예의 대강당에서 같이 떠들던 녀석과 셋이서 술집을 향했다.
편의상 이 글에선 그 녀석의 성씨가 변씨이므로 변학도라 부르고 또 한 녀석의 성은 심씨이므로 심학규라 부르기 하겠다.
심학규와 나는 그 녀석에게 학교 앞 시장골목의 허름한 대포집으로 끌리다시피 들어갔다.
그 옛날 홍대앞 기찻길 옆 서교시장 유서깊은 '진주집'을 아시는가?
진주집에 들어간 녀석은 자칭 역전의 술고래답게 다른 안주 시키지 않고 술국에 소주를 시키더니
다짜고짜 통성명 다시 하고 이 시간부로 서로 말을 놓고 지내자는 제안을 해서 승락!
그 때는 소위 통행금지가 있었던 때, 저녁 즈음 시작된 술자리는 어느새 통금이 임박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발 밑에 빈 소주병이 10여개 줄을 섰을 때에야 끝난 그 때의 시각은 이미 버스 막차도 끊어져 꼭지가 간 셋은 빈 방있는
여관을 찾아 신촌 동교동 거리를 헤맸다.
비척거리며 쓰러지려는 심학규를 하는 흡사 전쟁터의 부상병 마냥 변학도와 함께 부축하며 이미 통금 시작되어
쥐 죽은 듯 조용한 거리를 헤맸다.
이때 저쪽 골목에서 호각소리가 나더니 방범대원 두명이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술에 취해 도망도 못가고 곰짝없이 붙들린 우리는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드디어 그날 새벽, 통금이 끝나자 당직 경찰의 길고 긴 훈시를 듣고 풀려날 수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도 단장 못한 채 집으로 향했는데 집에서 아버지께 혼쭐 난 것은 당연한 일,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아침먹자마자 등교했는데 어제 아직 얼굴이 보이지 않던 변학도가 얼굴을 나타낸 시각은 첫 강의 중간 쯤.
심학규는 그날 첫강의부터 펑크를 냈고 다음날 등교한 그의 얼굴을 보니 손바닥만한 거즈에 반창고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30여년 전의 그 때 그 친구들이 이제 50대 중반이 되었다.
졸업 이후 변학도는 그의 전공대로 도예 작가가 되어
지금은 그의 아내와 함께 경기도 용인의 미리내저수지 부근에서 옹기장이로서의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미리내 들어가더니 15년간 우리와 연락 뜸한채 두문불출,
지난 5월, 인사동에서 그의 11번째 개인전 소식을 듣고 동기들과 함께 다녀왔다.
7월 중 동기들이 그의 작업장을 방문하기로 했다.
전공과는 적성이 맞지않아 진로에 대해 고심하던 심학규는
당시 은행가에 있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ㅇㅇ은행 대리급의 행원으로 취업,
신촌로타리의 지점에서 근무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본 후 연락이 끊겼다.
누구에게나 청년기의 이유없는 반항의 시기가 있다. 우리들의 청년기,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당시 어떻게 학교를 다녔는지 지금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후딱하면 긴급조치, 휴교령-
그 조치에 따라 강의가 전폐되었으므로
기약없던 휴강의 연속으로 야외스케치나 집에서의 과제로 학점을 매겨야 했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분노를 삭이지 못한 피 끓던 당시의 학생들은
술 마시지않고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학생들이 모이면 애창했던 노래 한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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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푸른 바다에 비가 내리면
무엇이 바다요, 무엇이 하늘이요
그 바닷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인 산 것이요,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보이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아물거리오
귓가에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저항가수 김민기의 '친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