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이 지나온 짧은 이야기 3...
이수인 시, 이수인 곡, 테너 팽재유
|
H공업고등학교 졸업 4개월 전인 1973년 10월,
삼화인쇄(주)에서 디자인실에 채용할 인턴사원 1명을 학교에 요구했고
학교에서는 나와 또 다른 우리과 동기생에게 복수 추천장을 써 주었다.
면접을 거쳐 실기는 과제로 이틀 말미를 주고 집에서 '삼화인쇄주식회사'의
레터링을 방안지에 해 오라는 주문이었다.
레터링을 집중적으로 독학한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주문대로 한글 뿐 아니라 한자와 영문까지도 해 갔더니 몇일 후
집으로 합격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이때부터 삼화인쇄 입사하였는데 졸업 때까지 인턴사원으로,
그 후엔 정식 사원으로 채용되었다.
막상 직장생활을 해보니 대우에 있어 고졸출신과 대학출신의 차별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대학에 가야겠다는 욕구가 생겼다.
가방에 도시락 2개 싸 가지고 6시에 종로2가 대일학원에서 새벽반을 수강,
끝난 후 도시락을 먹고 회사로 출근하였다.
퇴근 후에는 YMCA 옆 제일학원에서 단과반 한 과목을 수강하고 구성 및
데생의 실기과목을 위해 고교 선배가 운영하는 아현동 아뜨리에로 뛰었다.
대학진학에 대해 부모님과 위의 형, 누이에게 개별적으로 대학 진학에 대해
의논했으나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대학 진학을 반대하였다.
"원래 성적이 좋지 않은데 예비고사는 어찌 볼 것이며 설사, 합격한다 해도
대학엘 어떻게 진학하겠느냐, 다른 생각 말고 직장생활이나 열심히 해라..."
단 아버지 한 분이 예외적으로 진학을 두둔하셨다.
"그래 등록금 걱정은 하지 말고 열심히...그래서 꼭 합격하기 바란다."
아버지의 응원 덕이었을까? 예비고사 무난히 합격,
이듬해 H대학교 미술대학에 원서를 넣어 드디어 합격을 하고야 말았다.
1975년 3월 7일 입학식을 했던 그날도 잊을 수 없는날...
그러나 당시 냉전상황이었던 세계의 정세와 우리나라의 정국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으니 앞서서 1975년 2월 12일에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봄에는 긴급조치 7호(고려대 휴교령)가 선포되고
4월에는 캄보디아가 공산화 되었고 베트남이 공산군에 무조건 항복하는 등
급박하게 돌아갔다.
학원가의 '유신헌법 반대' 등 민주화의 운동에 문교당국은 급기야 고려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리는 등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을 확대하여 당시 학생들에게
학교 수업 없이 야외 스케치, 견학 등의 과제를 주어 그 결과에 따라 학점을 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가방들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 이 학교 저 학교 찾아 다니며 다른 대학 간 친구들도 만나 보았다.
아래 사진은 한양대학교 교정에서 친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