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世上萬事)/가족 이야기

무너진 아버지의 자존심 세우기...

green green 2009. 12. 11. 09:12

딸 아이가 고교 2학년 때였던 어느날,

집안 거실 한편에 낮선 널빤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제법 무게꽤나 나가는 두께 1.5센티의 합성목재로 만들어진 널빤지였다.
딸에게 다시 물어보니 기술.가정시간에 장롱을 설계하고 그 설계 도면대로
미니어츄어 장롱을 만들 때 쓰일 재료로 내일 학교에 다시 가져갈 것이라고...

"아빠 내일 저 나무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데 톱질로 정해진 규격대로 잘라가야 해요."
"알았다, 얼만큼씩 몇개를 어떤 규격으로 잘라야 하는지 얘기만 해라."
'톱질? 톱질을 해 본지 오래 되었지만 나도 학교 때는 목공정도는 잘 했으니
까짓 톱질 쯤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 문제의 널빤지를 자신만만하게 쓱쓱~

 

톱으로 자르기 시작했는데 이게 웬일?

두껍고 단단한 나무 위에선 톱날이 따로 논다. 이런!
쓱싹쓱싹~ 집요한 톱질과 날카로운 톱날에 나무가 굴복, 드디어 썰어지기 시작하더니
톱밥이 목재 위의 그어 놓은 연필선을 순식간에 가려 버린다.
다 자르고 나니 너비 20세티미터의 목재를 자르는데 5밀리미터의 큰 오차가 생겼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심하게 비뚤어진 나무조각을 확인한 순간 딸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애개?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비뚤게 잘랐어요? 아빠, 난 몰라~"
"아, 나뭇결이 단단해서 톱질이 잘 안되더라구, 아름아 어떻게 하지?"
"그럴줄 알았어요, 나무 위에 연필선이 가려지는데도 그냥 하시더니..."
아! 심하게 구겨진 아빠의 자존심, 톱질도 못하는 아빠...

옛날... 많은 우리 아버지들이 그러하셧듯이 나의 아버지도
톱, 대패, 망치, 끌, 대못, 송곳, 사포 등 목공기구를 잘 다루셨던 목공의 대가이셨다.
널빤지든 사과궤짝이든 각목이든 통나무든 합판이든 나무로 이루어진 그 어떤 재료라도
아버지 앞에서는 맥을 못추었다.
나무재료 앞에서 위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아버지가 일을 시작하면 그 재료들은 순식간에
아버지가 원하는 모양새가 되곤 했다.

 

잘못 잘라진 나뭇조각을 들고 서 있는 딸 앞에서 아버지의 옛모습이 떠 오른다.

'톱질 못하는 아빠는 용서할 수 있어도 아이의 과제를 망친 아빠는 용서할 수 없다!'
그때 떠오르는 생각, '그래, 목공소를 이용하자.'
아이에게 내일 목공소에서 잘라다 주겠노라 약속을 하고 톱질을 끝냈다.

이튿날 지하철을 이용, 중부시장과 방산시장을 끼고 있는
을지로 4가 목공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목공소는 서너개씩 닥지닥지 붙어있었는데 그중 한집을 선택, 정해진 사양을 설명하고
딸아이가 적어 준 널판지의 여러 조각들을 의뢰하였다.

지잉~...
둥근 전기톱날이 대 위에서 힘차게 돌아가며 널빤지 조각들을 순식간에 잘라낸다.
몇분 되지 않아 의뢰한 11개의 널빤지 조각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그 칫수들을 재어 보았더니
모두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잘 들어 맞는다.
균일한 표면, 똑바른 절단면, 네 귀퉁이의 각도 90도 정확히 맞는 것 같다.


깨끗하다, 같은 짝 두개를 붙여 다시 재어 보아도 1밀리의 오차도 없이 잘 맞는다.
쾌히 값을 지불하고 쇼핑백에 담긴 문제의 널조각들을 받아들고 목공소를 나왔다.
'아! 딸 앞에서 아빠의 자존심 지키기는 정말 힘들다,

 

그런데 아들에게는 괜시리 미안하다.
우리집의 장남인 아들녀석의 과제를

이렇게 자존심 결고 해 준적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