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뛰놀던 장안평, 그곳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그때의 장안동은 어린 우리들에겐 놀이터이자 자연학습장, 보금자리 같은 곳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분가할 때까지 살았던 전농동의 배봉산 너머 장안평에는
70년대 까지 논과 밭, 수로 등이 있었다.
배봉산은 정조가 경기도 화성에 융릉을 건설, 그곳으로 그의 아버지 되며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죽임당한 사도세자의 묘가 있었던 곳이다.
장안평, 일제 때 잘못 지어진 이름이라 하여 지하철역 이름을 장한평으로 개명한 곳...
북쪽의 휘경동에서 남쪽의 사근동까지 논배미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던 장안평,
우리는 그 때 그곳의 지명을 몰라 '성너머' 혹은 그냥 중랑천 옆 땅이므로 '중랑천'라고도 불렀다.
지금의 전농3동 로터리에서 동쪽으로 신작로가 좁게 나 있었는데 포장되지 않은 그 도로는
배봉산을 뚫고 장안평 끝의 중랑천 둑에서 끝났다.
일제 때 농임업실험장으로 쓰였던 곳이기에 농지정리는 물론 수로 역시 잘 조성되어 있었다.
지금은 대단위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 있어 옛날의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일요일이면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싸 간 도시락 까먹으면서까지 그곳에서 놀았다.
미꾸라지, 혹은 개구리 잡아 뒷다리 구워먹고 밭 주인 몰래 무우도 뽑아 먹으면서...
배봉산 아랫자락부터 중랑천에 이르기까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대여섯개의 수로가 있었는데
배봉산 밑 자락에서 제일 가까운 첫번 째 수로는 항상 시뻘건 녹물이 고여있었다.
그곳에 있었던 몇몇 공장의 영향으로 이미 그 때부터 물이 오염되어 있었기에 농수로 사용할 수
없었고 다른 농수로는 중랑천에서 흘러 들어 오는 깨끗한 물로 인해 언제나 풍성했는데
그 물에 들어가 뭃놀이도 하고 반두나 소쿠리, 삼태기로 고기를 잡았다.
미꾸라지가 특히 많아 날씨가 꾸물꾸물해서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누가 훑어도 미꾸라지를
한 양동이씩 잡아낼 수 있었던 곳이었다.
중학교 몇학년 때였던가?
11월 중순 무렵 생물시간에 해부한다고 커다란 개구리 한 마리씩 가져오라 했을 때
60여명의 우리 반 아이들 중 개구리를 준비해 간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장안평 덕분이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개구리가 겨울잠 자러 땅속으로 들어갔을 테니
물가에 없을 것 뻔히 알면서도 쓸쓸한 물가를 혼자 막대기를 휘젓고 다녔다.
곧 살얼음이라도 얼 것 같은 바람이 쌩쌩 부는 수로 둑의 밀생하는 억새풀 사이에서 개구리
한마리가 난데없이 나타나 풍덩, 물 속으로 숨어버렸다.
이미 가을 걷이도 끝나 수로에는 물이 말라있어 깨끗한 물 뻘 속을 헤집고 들어간 개구리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마음에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 뜻을 공감하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이튿날 생물시간에는 해부용으로 개구리를 가져 온 학생은 나 혼자 뿐이었다.
그 개구리는 희소성 때문에 해부되지 못하고 산 채로 생물선생님의 시청각 교재가 되어
이 반 저 반 유랑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79년 여름,
군 제대 후 옛생각에 자전거를 타고 그리운 장안평을 돌아보니...
웬걸?
그렇지 않아도 고등학교 때부터 쓰레기로 매립해 나가던 벌판이
어느새 말끔히 구획정리 되어있고 이미 한편에서는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막 생긴듯 잘 만들어진 도로는 깨끗하게 아스팔트포장이 되어
자전거 타기에는 그만이었다.
그때부터 30년이 넘은 지금...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와 주택, 그리고 룸살롱, 룸카페 퇴폐이발소, 퇴폐안마시술소, 모텔 등이
밀집되어 있어 때만되면 단속반과 한 바탕 전쟁 벌이는 그곳...
이제 그곳도 재건축 시기가 가깝지 않았나 모르겠다.
장안평의 그 많은 아파트와 주택들이 세워진 그 땅이 한때 넓은 논밭이었으며
서울시의 쓰레기로 매립, 바닥을 다져 건설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