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형을 추모함...
얼마전 선배의 동생이 돌아가신 소식을 접했다.
아직 한창 일 할 연세인 것 같던데...
선배는 이제 다시 이을 수 없는 형제애를 아쉬워 하며 몹시 슬퍼했다.
친 형제와의 死別은 부모와의 사별과는 또 다른, 엄청 큰 아픔으로 다가 온다.
내 위의 작은형님도 만 22년 전인 1988년 교통사고로 갑자기 별세하셨다.
8남매 중의 다섯 째인 작은 형은 그의 특이한 행동 때문에 남다른 추억이 많았다.
그 추억은 나의 지각이 어느정도 발달해 있었던 유년기부터 시작되지만
나의 초등학교 시절부터 써 내려 가야겠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다섯 살 위인 작은 형은 이미 고등학생이었는다.
형은 그 때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 가끔 막내에게 잔돈 푼을 미끼로 담배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또 너스레 좋았던 형은 당시 고등학교 3년 내내 버스안내양들과 알고 지낸 터에
버스표를 한 줌씩 얻어다가 우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자유분방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해병대에 입대, 하사에 임관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껄렁거리며 하릴없이 학생신분으로 술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등
친구들과 어울려 가끔 패싸움도 밥 먹듯 하고 다녔던 형이었다.
조금은 온화하던 구석이 남아 있었던 작은 형이 완전히 돌(?)처럼 변한 것도 그 때의 일이었다.
가뜩이나 선천적으로 좋지 않았던 형의 목소리도 쇳소리로 변해 있었다.
하사 임관 후 자대배치 전에 특별휴가를 나왔던 12월 어느날...
한잔 술에 거나하게 들어 온 작은형은 웬일인지 3동생을
(막내는 초등학교 5학년, 그 위는 중학 2년생,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을 옥상으로 집합시켰다.
그러더니 팬티만 남기고 옷을 홀딱 벗으라 하더니 웬 제식훈련을 시킨다.
"열중 쉬엇!....차렷!....앞으로 갓!....좌향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그 자리에 섯!....좌로 3보 갓!"
영하의 기온으로 접어든 12월의 밤, 우리의 입에서는 허연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우리 형제들은 그날 밤 작은 형에게 똑소리 나는 제식훈련을 마쳤다.
그 날 그 일 탓으로 막내는 감기에 걸렸으며 나중에 좀 더 나이먹은 후 안 사실이었지만
곧 자대배치되어 통솔할 분대원들의 훈련을 우리를 통해 실습을 해 보았던 것이었다.
그 후 형은 월남에 파병된다.
1973년 청룡부대원으로써 월남전에 참전했던 작은 형은 무사히 제대하였다.
'월남에서 돌아 온 새까만 남하사...'
그 이후 몇년 직장생활 하는 중 결혼 한 작은 형은 우리나라에 중동건설바람이 불자
또 우리나라를 떠나 중동에서 한 2년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다.
뒤 돌아 볼 겨를 없이 일 작은 형은 하나만큼은 열심히 했다.
이렇게 열심히 일했던 작은형님에게 다른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1988년 9월 어느날, 귀가 도중의 작은형은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신호무시하고 달려오던 한 과속 승용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혼수상태가 된다.
그날 한 밤중에 집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청량리 위생병원 중환자실에 가 보니
형님은 여전히 의식불명상태. 병원 당직의의 구급조치를 계속 시도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시간 후 형님은 우리와 명을 달리하는 처지가 된다.
작은 형의 사망은 2남매를 기르고 있던 형수님과 우리 형제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충격은 22년이 흐른 지금에야 가라앉았지,
10년 전만 해도 작은 형의 사망사실이 믿겨지지지 않을 정도였다.
작은 형의 산소는 팔당공원묘원,
양수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산소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수년전 설 명절 때 무릎까지 빠지는 눈 때문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산소는 돌아보지 못했으나 그래도 작은 형의 산소에는
고생을 해가며 성묘를 다녀왔다.
부모보다 더 빨리 진행된 형제의 별세가 더 안타까운 마음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