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과 세기말, 지구종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일컬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부른다.
1970년 중반에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제 3의 물결」에서
인용한 말인데 이제는 현대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다.
그의 예견대로 정보에 어두운 집단이나 개인은 경쟁에 뒤떨어지는 시대가 지금이다.
1000년을 한 단위로 100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를 ‘밀레니엄’이라고 하는데
‘밀레니엄’은 지구상의 인류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1000년 전 유럽의 ‘밀레니엄’ 사회는 인간정신의 퇴폐적 경향, 회의주의, 찰라적 향락주의가
극에 달했는데 세상 종말 이 곧 온다는 두려움에서 기인하였다.
세상 종말을 믿은 유럽의 서방에서 떠돌던 기독교인들은 이때즈음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다.
서기 1000년을 목전에 두었던 지금으로부터 1000여년전의 중세 유럽은 한마디로 암울과
공포시대가 계속되었던 시기였다. 당시의 유럽 여러나라는 끊이지 않는 전쟁과 전염병,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계속되고 보니 기독교가 국교였던 유럽의 여러나라 국민들은 서기 1000년을
'세상의 끝날'이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기도 했으며 그렇게 믿었을만 했다.
일자일획도(一子一劃)도 틀리지 않는다는 성경은, 언제라고 명시하지 않았지만 세상 끝날이
가까운 시기에 꼭 온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000년이 지나고 1001년이 되도록 '세상의 끝날'은 오지 않았으며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유럽의 당시 사람들에게서 밀레니엄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1000년이 지나면 '세상의 끝날'이 올줄 알았는데 오지 않았으니 일부 학자층 중심으로
혹시 장래 한 세기가 끝날 때 오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근세 유럽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기말 현상'은 이러한 사연에서 유래했던,
한 세기가 끝나는 100년 주기로 나타나는 이른바 사회문화적 현상이었다.
세기말 현상은 구세대에는 환멸과 비애를,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하는 신세대들에게는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함을 가져다 주기도 했는데 특히 1900년대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1800년대 말의 세기말 현상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이 이데올로기는 세계의 역사를 온통 바꾸어 놓기에 이르렀으니 한때 일부나마 유럽세계를
정복했던 공산당 이론이 바로 이때 나온 부산물이었다.
지금부터 10년 전이었던 서기 2000년, 기원 후 두 번 째 밀레니엄을 맞는 시기가 있었다.
1999년, 서기력 1000년대가 끝나고 또 새로운 2000년대의 새천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그때에도, 혹시 올줄도 모르는 기독교 성경 속에서 가르킨 1000년 왕국과 이른바 '세상의 끝날'에
관한 막연한 불안과 초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늘 꼬리표처럼 따라녔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전화도 불통이 될 수 있으며 어쩌면 핵 원자로가 녹아내리고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갑자기 떨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이른바 '밀레니엄 버그' 라고 불렸던
컴퓨터 대란이 가져올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태는 오지 않았으며 이에 반응,
Y2K라는 생소한 용어까지 만들어진 사회는 기업의 광고 마케팅 전략에 의해 오히려 21세기, 새천년,
새로운 밀레니엄 등으로 부르며 이를 맞이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1000년 전 첫 번째 밀레니엄과 달리 막연한 두려움은 커녕 오히려 기업과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밀레니엄은 그들의 마케팅전략으로 이용 당하는, 가히 대단한 상술의 소재가 되고 만 것이다.
과거 1000년 전의 첫 밀레니엄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지난 두번째의 밀레니엄은
즐거움속에서 기대하며 맞는 밀레니엄이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현명한 생각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세상의 끝날이 오늘이면 어떻고 내일이면 어떤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위기를 피할 수 없다면 그것과 사귀라는 역설적인 훈수이며 위기 앞에 허둥지둥 비겁하게 굴지말고
당당히 현명하게 맞으며 그렇게 살라는 뜻일 것이다. 철학자 스피노자도 한 수 훈수한다.
"내일 세상이 끝나더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