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世上萬事)/낚시 이야기
일찍 찾아 온 암흑기
green green
2002. 12. 29. 08:19
혼자 배운 나의 낚시도 대학에 진학한 후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
고등학교졸업하고 한 해 재수하면서 필기공부와 실기를 더욱 더 열심히 해야 했던 것도 원인이었지만
진학 후 낚시보다 재미있는 대학생활과 가끔 했던 아르바이트가 그 원인이었던 것이었다.
공부하며, 이렇게 저렇게 놀며, 아르바이트하던 생활도 1977년 군입대와 함께 일단 끝나고 말았다.
그 당시의 군생활은 32개월 복무였고 2년동안 학교에서 받은 군사교육인 교련의 수강덕택으로 4개월이나
면제 받아 28개월의 군대생활을 하였다.
설날을 이틀 앞둔 그해 2월 7일(그 해는 왜 그리 유난히 추웠던지...) 논산훈련소에 입소,
후반기교육(김해의 구포에 있는 공병학교)을 거쳐 배치된 곳은 동두천에 사단본부가 있고 김포군 적성면
어유지리에 소재하는 28사단 81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
연대의 선봉부대였기 때문에 좀 힘든 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된 생활이었지만 한탄강을 옆에 끼고 있어 늘 물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그래도 그것 하나는 좋았다.
시외버스종점이었던 어유지리에는 일요일이나 휴일 한탄강에서 낚시를 하려고 서울에서 많은 낚시꾼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강변으로 들어갈 때 꼭 우리부대의 담벼락을 거쳐가곤 했는데 보초를 서면서 이들의 모습을 보면
낚시를 오랫동안 떠나있던 나를 이내 발견하게 되고
낚시가 무척 하고 싶어졌다.
북으로 임진강과 남으로 한탄강의 합수지역인 어유지리에는 강변을 따라 낚시할 곳이 꽤 많았다.
그러나 나에겐 그림의 떡...
고생할 때는 과거 좋았던 시절의 생각을 떠 올리는게 인간의 심성인듯 싶다.
'지금 쯤 집에 있는 낚싯대엔 곰팡이가 슬고 있겠지? 아니야 작은형이 내 낚시대를 사용할 것 같은데...'
이런저런 낚시에 대한 생각을 하며 한탄강을 오고 가는 낚시꾼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물가로 달리고 싶은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곳에 낚시오는 서울의 꾼들은 밤낚시도 하곤 했는데 한탄강변으로 매복나가는 날이면 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우리 분대원들은 이 낚시꾼들을 검문.검색하며 그들의 비상식량인 통조림 등을 노획(?)하곤했다.
때로는 참외밭과 수박밭을 서리하면서 밤을 지새우면 한탄강변의 새벽은 빨리도 왔다.
전방의 보병연대는 3년마다 한 번씩 휴전선 비무장지대 근무에 들어간다.
상병을 달던 그 이듬해 초가을 우리부대도 예외없이 철책(우리는 이렇게 불렀음.)으로 부대이동을 하였다.
이때는 상병고참일 때라 위에 모시는 고참보다 아래 거느리는 신참과 중참이 더 많아 군 생활이 편할 시기였다.
철책근무는 처음에 얼마간 적응할 때가 좀 어렵고 적응후에는 나름대로 내무반생활이 더 재미있고 편했다.
부대가 철책으로 이동전에도 그랬지만 과격한 보병 소총수의 생활은 내가 끼고 있는 안경이 부러지거나
깨어져 불편을 겪을 때가 많았다.
서울이 집이었던 나는 그 때마다 아버지께서 안경을 맞추어 나에게 갖다 주시곤 했는데 그 날은 외출이나
외박이 허락되었던 터에 어쩌다 안경이 깨어지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히려 은근히 좋아하곤 했다.
제대를 두달 앞두고 또 안경이 부러져 아버지께서 면회를 오셨다.
전곡시내에서 아버지가 사 주신 점심을 든든히 먹고 우리는 전곡교 위를 걸었다.
아버지는 고향이 경기도 양수리이기 때문에 물을 좋아하셨다.
반두로 물고기를 잡는 천렵을 좋아하셨고 주로 방울이나 견지를 하셨지 찌보는 대낚시는 잘 하지 않으셨다.
예나 지금이나 한탄강은 절벽과 절벽사이로 흐르는 곳이 많아 물살도 빠르지만 그 경개가 빼어났다.
전곡교 밑을 흐르는 한탄강을 바라보며 아버지께서는 한탄강을 극구 칭찬하시며 나 제대 후 일요일마다
가끔 한탄강엘 놀러 오자고 하시며 나를 위해 낚시대를 사 놓으셨단다.
이러셨던 아버지께서 내가 제대 후 열흘만에 물가에서 돌아가실 줄이야...
고등학교졸업하고 한 해 재수하면서 필기공부와 실기를 더욱 더 열심히 해야 했던 것도 원인이었지만
진학 후 낚시보다 재미있는 대학생활과 가끔 했던 아르바이트가 그 원인이었던 것이었다.
공부하며, 이렇게 저렇게 놀며, 아르바이트하던 생활도 1977년 군입대와 함께 일단 끝나고 말았다.
그 당시의 군생활은 32개월 복무였고 2년동안 학교에서 받은 군사교육인 교련의 수강덕택으로 4개월이나
면제 받아 28개월의 군대생활을 하였다.
설날을 이틀 앞둔 그해 2월 7일(그 해는 왜 그리 유난히 추웠던지...) 논산훈련소에 입소,
후반기교육(김해의 구포에 있는 공병학교)을 거쳐 배치된 곳은 동두천에 사단본부가 있고 김포군 적성면
어유지리에 소재하는 28사단 81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
연대의 선봉부대였기 때문에 좀 힘든 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된 생활이었지만 한탄강을 옆에 끼고 있어 늘 물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그래도 그것 하나는 좋았다.
시외버스종점이었던 어유지리에는 일요일이나 휴일 한탄강에서 낚시를 하려고 서울에서 많은 낚시꾼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강변으로 들어갈 때 꼭 우리부대의 담벼락을 거쳐가곤 했는데 보초를 서면서 이들의 모습을 보면
낚시를 오랫동안 떠나있던 나를 이내 발견하게 되고
낚시가 무척 하고 싶어졌다.
북으로 임진강과 남으로 한탄강의 합수지역인 어유지리에는 강변을 따라 낚시할 곳이 꽤 많았다.
그러나 나에겐 그림의 떡...
고생할 때는 과거 좋았던 시절의 생각을 떠 올리는게 인간의 심성인듯 싶다.
'지금 쯤 집에 있는 낚싯대엔 곰팡이가 슬고 있겠지? 아니야 작은형이 내 낚시대를 사용할 것 같은데...'
이런저런 낚시에 대한 생각을 하며 한탄강을 오고 가는 낚시꾼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물가로 달리고 싶은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곳에 낚시오는 서울의 꾼들은 밤낚시도 하곤 했는데 한탄강변으로 매복나가는 날이면 나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우리 분대원들은 이 낚시꾼들을 검문.검색하며 그들의 비상식량인 통조림 등을 노획(?)하곤했다.
때로는 참외밭과 수박밭을 서리하면서 밤을 지새우면 한탄강변의 새벽은 빨리도 왔다.
전방의 보병연대는 3년마다 한 번씩 휴전선 비무장지대 근무에 들어간다.
상병을 달던 그 이듬해 초가을 우리부대도 예외없이 철책(우리는 이렇게 불렀음.)으로 부대이동을 하였다.
이때는 상병고참일 때라 위에 모시는 고참보다 아래 거느리는 신참과 중참이 더 많아 군 생활이 편할 시기였다.
철책근무는 처음에 얼마간 적응할 때가 좀 어렵고 적응후에는 나름대로 내무반생활이 더 재미있고 편했다.
부대가 철책으로 이동전에도 그랬지만 과격한 보병 소총수의 생활은 내가 끼고 있는 안경이 부러지거나
깨어져 불편을 겪을 때가 많았다.
서울이 집이었던 나는 그 때마다 아버지께서 안경을 맞추어 나에게 갖다 주시곤 했는데 그 날은 외출이나
외박이 허락되었던 터에 어쩌다 안경이 깨어지면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히려 은근히 좋아하곤 했다.
제대를 두달 앞두고 또 안경이 부러져 아버지께서 면회를 오셨다.
전곡시내에서 아버지가 사 주신 점심을 든든히 먹고 우리는 전곡교 위를 걸었다.
아버지는 고향이 경기도 양수리이기 때문에 물을 좋아하셨다.
반두로 물고기를 잡는 천렵을 좋아하셨고 주로 방울이나 견지를 하셨지 찌보는 대낚시는 잘 하지 않으셨다.
예나 지금이나 한탄강은 절벽과 절벽사이로 흐르는 곳이 많아 물살도 빠르지만 그 경개가 빼어났다.
전곡교 밑을 흐르는 한탄강을 바라보며 아버지께서는 한탄강을 극구 칭찬하시며 나 제대 후 일요일마다
가끔 한탄강엘 놀러 오자고 하시며 나를 위해 낚시대를 사 놓으셨단다.
이러셨던 아버지께서 내가 제대 후 열흘만에 물가에서 돌아가실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