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green 2003. 1. 11. 12:05
아버지가 돌아가신후끊었던 낚시가 어느날 슬그머니 다시 할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라면으로 유명한 N회사의 홍보실에 근무시작한 이듬해인 1982년
어느 봄날 홍보실의 직원들은 안성 금광저수지에서 낚시야유회를 가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물가에서 낚시하다 돌아가신 직후 낚시생활을 청산했던 터라
낚시대 하나 있을리 없었던 나는 홍보실 선배의 낚싯대를 빌어 낚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때만 해도 끼워넣기 식의 대나무재질의 낚싯대와 안테나식(그 때만 해도 그렇게 불렀음.)
글라스롯드재질의 합성수지낚싯대가 공존할 때였다.
이때 나는 글라스롯드 낚싯대를 처음 만져보았다.

그후 3년... 1985년은 나의 낚시생활에 있어 중요한 해로 기억된다.
광고대행사에서 일해보고 싶은 충동에 N회사에서 옮긴 당시의 직장이던 광고대행사
D기획에서 몇몇 뜻있는 상사와 후배들이 모여 낚시회를 창립하였던 것...
그때까지 D기획에서 산악회 활동을 하던 내가 낚시회에 가입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우선 다른 회원들과 함꼐 지금은 없어진 충무로의 해동낚시전시장에서 대낚시
전 장비를 공동구매하였다.
이제 낚시장비 일체가 내 손안에 들어온 것이다.
해동낚시는 그 당시 낚시업계의 제일이었고 반도낚시를 비롯한 낚시대 제조회사가
그 뒤를 치열하게 좇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삽입하는 스타일의 대나무로 만든 낚싯대의 시대는 끝나고 글라스롯드 낚싯대가
그 자리를 대신 하고 있었다.

처음 갖게 된 글라스롯드 낚싯대는 3.5, 3.0, 2.5칸의 세대와 받침대, 태클박스,
낚시의자, 칸드레, 살림망 등의 필수장비와 가방을 포함한 전장비의 가격은 120,000원의
거금(당시 나의 봉급은 45만원 정도로 기억됨.)에 3개월 할부로 구입하였던 걸로 기억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낚싯대를 비롯한 나의 장비는 이때 장만되어 그 때부터 지금까지
쓰고 있는 것들이 태반이다.
나는 이 직장낚시회 '홍조회'에서 초대총무로 선출되어 3년동안 총무생활을 하게 된다.
낚시경력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낚시회였지만 회사에서 매월 활동비가 지원되었고
회원들의 호응도 높아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홍조회'의 정기출조는 한달에 한 번, 이렇게 다시 시작한 나의 낚시는 흡사 그칠줄 모르는
폭주기관차처럼 무서운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희망하는 몇몇 홍조회 회원들과 거의 매주 토요일 출조를 하곤 했는데 여의치 않으면
혼자 출조도 불사했다.
그 때는 승용차가 아직 흔치않던 시절이라 시외버스를 이용하기도 했고 전철이나
열차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다.
간혹 운이 좋으면 동반출조자의 승용차로 출조지까지 가기도 했는데 주로
고삼지, 송전지, 금광지, 공릉지, 보통리 저수지, 파로호, 충주호, 원남지, 초평지,
예당지, 고북지, 배다리지 등으로 다녔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칸드레의 희미한 조명을 받아 찌가 쑤욱하고 솟던 한여름밤의 낚시는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으로 나의 마음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가끔 건너편의 칸드레 불빛 때문에 서로 고래고래 고함치며 "불꺼!" 하며 신경전을
벌이다가도 아침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로 태연했던 우스꽝스럽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물과 화합하며 한창 타오르던 카바이트 개스의 그을음이 칸드레의 구멍을 막아 순식간에
빛을 잃어버려 깜깜해지던...,
그 구멍을 군용전화선 PP선으로 어렵게 뚫느라 애쓰던...,
그나마 PP선이 준비 되지 않거나 카바이트가 떨어지면 울며 겨자먹기로 밤낚시를 종쳐야 했던...,
부글대며 개스를 방출시키던 칸드레에 불이 붙어 조용하던 낚시터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던...,
불덩이가 된 칸드레를 황급히 물속으로 쳐박아 불을 끄고 나서 건져 낸 칸드레의
개스구멍을 입으로 빨아내어 물기를제거, 막힌구멍을 뚫어야 했던...,

이렇게 수많은 비상사태가 발생되었지만 그것 없인 밤낚시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가
바로 그 때의 모습이었다.
예비 칸드레 없이 하는 밤낚시는 칸드레 불빛의 강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불안에 떨었고
일단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할 수 없이 기나긴(?) 여름밤을 한탄과 후회속에 보냈던 것도
그 때의 밤낚시 풍경이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인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대충 1986년으로 기억됨.)
그 소란스럽던 칸드레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오징어잡이 배에서 오징어낚시용으로 쓰던 캐미라이트가 대낚시계를 강타한 것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을 강타한 캐미라이트는 이렇게 소란(?)스럽던 밤낚시의 풍경을 순식간에
뒤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칸드레에사 캐미로 바뀌던 시절, 직장낚시회인 '홍조회'와 함께 다시 시작한
나의 낚시는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 시절 있었던 재미있거나 특이한 이야기를 여기에 쓰면 밤을 새도 모자랄 것 같기에
앞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써 내려가기로 하고 ...

'홍조회' 정기출조와 비정기 출조, 그 외의 개인출조를 하다 보니 낚시철이면 거의 매주
물가를 배회했던 당시 만나거나 사귀는 여자도 없이 이미 서른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좀 우스운 얘기이지만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낚시에 관한 한 열정파인
몇몇 낚시후배님들을 보면 그 때의 내 생각이 나기도 해 혼자 피식 웃기도 한다.
이렇게 토요일 밤낚시를 떠나지 못하면 일요일 새벽에라도 낚시를 떠나는데
일요일 아침식사할 때 내가 없으면 식구들은 아예 낚시 떠난 줄 알고 있었다.
어떤 날은 내가 화장실에 간줄 모르고 새벽녘에 으례히 낚시 떠난 줄 착각한 어머니께서
내 아침밥을 식탁에 올리지 않은 적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화려했던 나의 낚시외도도 갑작스런 복병의 출현으로
서서히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