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어머니는 여자보다 강하다'편에 이어...
당시 어머니는 청계천5가에서 들어가는 광장시장의 한 모퉁이 보잘것 없는 가게를 얻어
장사를 하시던 중이었는데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일 하셨다.
토건업 하도급 사업자이셨던 아버지는 일은 많이 하셨으나 돈은 벌지 못했다.
아버지의 일이 끝나면 돈은 커녕 오히려 빚장이들이 집에 몰려왔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긴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 특유의 대쪽같은 자존심을 버리고
친정에 가서 돈을 빌려다가 위기를 넘기곤 하셨다.
나중엔 이모에게까지 돈을 빌리셨던 일로 인해 자매의 우애는 한동안 서먹하게 된다.
결국 아버지가 사업상 진 빚들은 중노동으로 시장에서 어머니가 번 돈으로 모두 갚게 된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신 어머니의 땀과 정성으로 8남매는 무럭무럭 컸다.
일제시대 만주에 계실 때 사업가로서의 전성기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는
토목공사 외에 몇가지 일을 시작하셨으나 하나같이 성공하는 사업은 없었다.
그 사이에도 아이들 학비 대랴, 남편 사업자금 대랴... 한시도 어머니는 마음 편할 때가 없었다.
이 땅에 민주화의 바람이 한창 불던 1977년 2월에 군 입대한 내가 제대하던 1979년 즈음,
사업상 지게 된 아버지의 빚을 모두 갚으신 예순 넘으신 어머니는 그제서야 한숨 돌리며
시장의 가게를 정리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때까지도 하시는 사업마다 부진을 면치 못해 나중엔 아예 돈 들어가는
사업은 생각지도 않으셨던 그때의 아버지 연세가 예순일곱.
8.15 광복 이후 만주에서 입국, 6.25 이후부터 계속된 사업의 불운으로 어머니를 힘들게 하셨고
어머니의 속을 끓게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그해 여름 한탄강에 친구분들과 놀러 가셨다가 실족, 급류에 휩쓸려 돌아가시게 된다.
한탄강변에서 실종 만 하룻만에 발견된 아버지의 익사체를 부여잡고 우시며,
'이제 좀 살만한데 돌아가셨다'며 목놓아 슬피 우시다가 실신한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지 단 열흘 밖에 안된 때였다.
밖에서 돌아가셨으니 전통에 따라 장사는 한탄강에서 노제로 지내졌고 아버지의 시신은
고향 땅,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공설묘지에 모셔졌다.
49재까지의 상식 올리기... 요즘에도 그렇게 하는 집 있을까?
어머니는 49재 전까지 아버지의 영정을 안방에 모셔두고 매 끼니마다 세가지 나물에
흰밥을 올려는 소위 상식이란 것을 올렸다..
그후 1993년 부터 1998년,
연세가 8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우리집에 계셨다.
큰형님 미국 이민 떠나시고 작은 형님은 1988년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뜨셨으니
3남인 내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던 것.
그 중에 어머니는 사고로 고관절 뼈 파손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리고 파손된 고관절 보철삽입 수술을 받고 회복중에 퇴원, 보철이 이탈되어
다시 입원, 재수술을 받으셨다.
재수술을 받은 날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신 어머니는 말씀도 기억도 또랑또랑하셨다.
문병 온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반갑게 맞을 정도로.
그날 밤, 중환자실에서 내가 어머니를 지켜보는 가운데 주무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호흡이 곤란해지시며 무언가 썩은 피 같은 검은 물을 토해내신 후 돌아가셨다.
나중에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피 썩은 것 같은 검은 물은 일생중 어머니의 속이 타 생긴 분비물질이라고...
그렇게 어머니는 한 많은 생을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마감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발인 마치고 산소에서 내려 오시던 어머니의 부탁하신 말씀이 기억났다.
"나 죽으면 그냥 화장해라, 네 아버지 있는 이곳에 함께 묻지 말고...."
아마도 어머니의 한스러운 생을 그 한 마디로 표현하신듯 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돌아가셔서나마 함께 좋은 시간 가지시라는 우리 자녀들의 소원으로
아버지의 고향이 바라보이는 산소에 싫으나 좋으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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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옹박 팔자'는
당시 고생하시던 어머니의 한스런 푸념이셨다.
참고로 사전을 찾아 본 뒤웅박팔자는
'남자에 의해 팔자가 결정된다'는 뜻의 말이다.
더 적너러하게 표현하고 싶은 어머니의 눈물어린 시절이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자존심을 지켜 드리기 위한 나의 배려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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