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의 어머니 故 김애자(金愛子 오른쪽)님과 학교동창 분의 뱃놀이, 1940년 경으로 보인다.
단 한 장면 남은 어머니의 독사진, 그나마 사진이 찢어져 머리 부분이 잘렸다. 신혼 초 추정...
양수리에서 거주했던 7년 동안 어머니는 배워야 한다며 야학을 열어 친척들과 고향의 남녀노소에게
한글과 산수 등 기초 학문을 가르쳤으며 큰댁의 조카(나의 사촌형)들을 양수국민학교에 입학 시켰다.
또 6.25 전후 할머니와 함께 고향의 어려운 사람들이나 길손들을 위해 거의 매일
큰 가마솥에 밥과 국을 잔뜩 지어 나누었다.
시어머니나 며느리아 손 큰 것과 어려운 이웃 돕는 마음은 한 가지, 이제 이 때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1913(계축癸丑)년에 태어나 한학으로 세상을 깨우친 아버지께서 아직 미혼이셨던 시절, 집을 나오셔서
1915년 출생, 돈 벌겠다고 4번 째 집 나온 현대건설 고 정주영 회장과 함께 인천부두 근로자로 일하셨다.
그 후 아버지는 인천에서 만주로 떠나 소규모 토건업을 시작, 번창하였고
정주영 회장은 서울로 상경하여 쌀가게, 자전거포, 자동차 수리공장 등을 하였다.
만주에서 8.15 광복 귀국 전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 green의 부모는 좌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현재 미국 이민가 있는, 만주가 고향인 해방둥이 큰형님. 양수리에서의 한 때이다...
8.15 광복 때 만주에서 어머니와 함께 그해 3월에 낳은 젖먹이(큰형)를 안고 귀국하신 아버지는
고향인 양평군 용담리(양수리)에서 제재소, 마차공장, 정미소 등을 경영하셨으나 6.25 때 파산하셨다.
아버지가 당시 벌인 사업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에 들어서는 시기에 하나같이 사양길에
오르거나 곧 오르게 되는 업종이었다. 자동차 시대에 웬 마차? 그러니 파산할 수 밖에...
반면 아버지와 함께 일을 시작한 정주영씨 현대건설과 계열사를 거느리기 시작했다.
양수리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한 우리집은 6.25 이후 서울로 상경, 동대문 밖 제기동에 거처를 마련했다.
일제시대 만주에 계실 때 사업가로서의 전성기를 잊지 못하는 아버지는 토목공사를 쫓아 다니셨다.
아버지는 가끔 정주영 회장을 통해 현대건설 일을 하청 받아 했는데 이미 그때 두 분은
친구 사이를 넘어 갑과 을 사이가 되어 정주영 회장 입장에서는 아버지를 직접 만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는 사업 목적 등으로 정주영 회장의 동생 정인영 회장을 1976년 까지 만났다.
당시 한 창 붐이었던 중동에 내 위의 작은 형을 보내기 위해 전님형회장을 만난 것이 아버지와
정씨 일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만남과 도움으로 해병대 출신의 작은 형은 중동에 진출, 4년을 근로자로 일하고 돌아왔다.
서울에 정착한 어머니는 보따리 장사인 행상을 거쳐 청계천5가 광장시장의 한 모퉁이에
보잘것 없는 가게를 세 얻어 장사를 시작,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일 하셨다.
토건업 하도급 사업자이셨던 아버지는 쉬지않고 일을 많이 하셨으나 돈은 벌지 못했다.
아버지의 일이 끝나면 돈은 커녕 오히려 빚장이들이 집에 몰려왔다.
green의 큰 이모와 외할머니 그리고 이종4촌 누님들과 형...
일년이면 9개월 정도를 공사 현장에 계셨던 green의 아버지, 우측에 계신 분...
빚장이들 등쌀과 때문에 돈 빌려 오라는 아버지의 재촉과 성화에 못이긴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 특유의 대쪽같은 자존심을 버리고 친정집에 가서 외삼촌에게 돈을 얻어다
위기를 몇 번 넘겼다. 안암교 근처 큰 저택에 살던 외삼촌댁은 당시 서울에서 4번 째 부자라
할 만큼 잘 살았지만 오빠에게 돈 달라고 하기가 미안해 나중엔 이모에 돈을 빌리셨던 일로 인해
자매의 우애는 한동안 서먹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의 부지런함으로 서울에 올라온지 13년 만에 내집 마련을 하게 되었는데
방 4칸에 텃밭 가꿀 정도의 꽤 넓은 마당의 집을 샀는데 불운의 연속, 땅주인과 집주인이 다른 집을 속아 샀다.
나중에 나타난 땅주인에게 패소하여 강제로 집을 철거 당하고 사정하여 그 집터 한 모퉁이에 움막을 지어
1년 6개월을 거주했다.
이 때가 가장 어려운 시기, 내집이라고 마련한 집을 갑작스레 철거 당한 후 어머니는 일시적인 실성을 하게 된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1940년대의 사진...
아버지의 키타 연주, 애수의 소야곡을 특히 잘 치셨다.
이때 장남인 큰형은 1961년 군대에 자원입대. 집안의 이 어려운 시국을 피해 가고 있었다.
군 생활 실성한 동안 제정신 아닌 어머니는 며칠동안 멍한 상태로 아침에 집을 나가 시내를 방황하다
밤에 돌아오셨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내가 그 뒤를 줄곧 따라 다니며 보살폈다.
아마도 우울증이 한꺼번에 겹쳐 움막집에 덩그머니 있으시기가 죽기보다 싫으셨던듯...
며칠 후 제 정신 돌아온 어머니의 정신은 더욱 삶의 애착을 보이셨고 그 전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강인해지셨다.
겨울을 움막집에서 넘기고 이듬해 봄이 오자 집을 이사했고 어머니는 시장에 더 일찍 나가 더 늦게 돌아 오셨다.
그러기를 몇 년, 아버지가 사업상 진 빚들은 결국 어머니가 시장에서 중노동으로 번 돈으로 모두 갚게 된다.
어머니의 눈물과 땀과 정성으로 8남매는 무럭무럭 컸다. 공사 현장에 계신 아버지는 물론 밤늦은 시각이 되기 전엔
어머니도 없는 집의 가장은 큰 누나, 가정교사이며 어머니의 역할을 다 했다.
이 땅에 민주화의 바람이 한창 막바지였던 1979년 즈음,
아버지의 빚을 모두 갚으신 어머니는 한 숨 돌리며 그동안 일했던 시장의 가게를 정리하셨다.
8.15 광복 이후 만주에서 입국, 6.25 때 파산, 그 이후 사업 불운의 연속으로 어머니를 힘들게 하셨던 아버지,
그해 여름 아버지는 친구분들과 한탄강에 놀러 가셨다가 실족, 급류에 휩쓸려 돌아가시게 된다.
실종 만 하룻만에 한탄강 하류에서 발견된 아버지의 익사체를 부여잡고 우시며,
'이제 좀 살만한데 돌아가셨다'며 목놓아 슬피 우시다가 실신한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군에서 제대한 지 단 열흘 밖에 안된 때였다.
밖에서 돌아가셨으니 전통에 따라 장사는 한탄강에서 노제로 지내졌고 아버지의 시신은
고향 땅,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 공설묘지에 모셔졌다.
49재까지의 상식 올리기...
요즘에도 그렇게 하는 집 있을까?
어머니는 49재 전까지 아버지의 영정을 안방에 모셔두고 매 끼니마다 세가지 나물에
흰밥을 올려는 상식을 올리셨다.
1981년 2월 green의 대학 졸업식장에서의 어머니...
돌아가시기 10년 쯤 전인 1990년 경의 여권용 사진, 영정으로 사용했다.
그후 1993년 부터 1998년, 연세가 82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5년동안 어머니는 우리집에 모셨다.
큰형님 미국 이민 떠나시고 작은 형님은 1988년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나셨으니
3남인 내가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던 것. 그 중에 어머니는 사고로 고관절 뼈 파손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리고 파손된 고관절 보철삽입 수술을 받고 회복중에 퇴원, 보철이 이탈되어 다시 입원, 재수술을 받으셨다.
재수술을 받은 날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신 어머니는 말씀도 기억도 또랑또랑하셨다.
문병 온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반갑게 맞을 정도로.
그날 밤, 중환자실에서 내가 어머니를 지켜보는 가운데 주무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호흡이 곤란해지시며 무언가 썩은 피 같은 검은 물을 토해내신 후 돌아가셨다. 이 날이 1998년 1월 8일...
나중에 누군가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 피 썩은 것 같은 검은 물은 일생중 어머니의 속이 타 생긴 분비물질이라고...
그렇게 어머니는 한 많은 생을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마감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발인 마치고 산소에서 내려 오시던 어머니의 부탁하신 말씀이 기억났다.
"나 죽으면 그냥 화장해라, 네 아버지 있는 이곳에 함께 묻지 말고...."
아마도 어머니의 한스러운 생을 그 한 마디로 표현하신듯 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돌아가셔서나마 함께 좋은 시간 가지시라는 우리 자녀들의 소원으로
아버지의 고향이 바라보이는 산소에 싫으나 좋으나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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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로부터 '뒤옹박 팔자'란 말을 많이 들었는데 당시 어머니의 한스런 푸념이셨다.
참고로 사전을 찾아 본 뒤웅박팔자는 '남자에 의해 팔자가 결정된다'는 뜻의 말이다.
어머니는 정말 남 모르는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그 눈물의 세월 속에서 실성한 적도 몇 번 있으셨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해도 모자란 어머니의 눈물어린 시절이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기도 했거나와
어머니의 자존심을 지켜 드리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생각에서였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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