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世上萬事)/낚시 이야기

낚시로 진급하기...

green green 2003. 3. 28. 21:43
장마가 오기 직전이었던 1986년 6월 말 직장낚시회인 홍조회(편의상 낚시동호회라 부르기로 한다.)에 비상이 걸렸다.
근무가 끝나가는 금요일 오후, 내 책상위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N대리 : 네, 제작2국 N대리입니다.
상대편 : 아! N대리? 난데 내일 비상출동이다.
N대리 : 예? 비상이요? 부장님, 무슨 말씀인지...???
상대편 : 다름이 아니고 내일 근무 끝나고 오후에 시장님, 이사님들 모시고 낚시를 가야 해.
N대리 : 낚시요? 웬 예정에도 없는... 전 내일 선약이 있는데요.
상대편 : 선약은 무슨 선약! 준비든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N대리는 내일 따라오기만 해.
N대리 : 알았어유~ ㅜㅜ

비상을 발동한 사람은 동호회장님이셨고 내용은 당시 대표이사이셨던 N사장과 J이사, l이사 등 임원진과 낚시동호회
임원과의 친선낚시를 한다는 내용...


산악동호회, 테니스동호회, 영화감상동호회, 음악감상동호회, 촬영동호회 등 직장내의 여러 동호회가 있었지만 활동이
제일 활발한 홍조회인지라 그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동호회장님이 친히 사장님과 이사님들을 초청하는 성격의 출조였던 것.
이렇게 이번 출조는 사장님이 이사들과 함께 하는 터라 진행에는 신경이 좀 쓰였지만 참여인원이 회사의 임원진과
낚시동호회의 몇몇 임원으로 제한되어 모든 준비는 동호회장님이 알아서 하셨으므로 비교적 부담이 없는 출조였다.
이 좋은 기회를 동호회 N부장님이 놓칠리 만무했다.
N부장님은 사장님과 이사님들이 평소 좋아하는 누렁이를 한 마리
맞추어 집에서 갖은 양념과 야채, 과일 등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하셨단다.

당시 내가 몸 담았던 직장 D기획에는 사장님의 성과 본관까지 같은 성인 N씨가 많았다.
본인을 포함하여 여러 명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N씨 성 가진 사람들이 사장님의 인척이라도
되는 줄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다.
한 예로 총무과에 근무하는 모 대리는 어느날 퇴근 후 반 강제적으로 나를 회사근처의 맥주집에 데리고 가
'당신이 사장님의 인척인지 다 알고 있다.'면서
'절대 그렇지 않다, 잘못 알고 있다'는 나에게 '잘 부탁한다'며
주공을 펼치는 해프닝도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이날 낚시는 N사장, 동호회장인 기획파트의 N부장, 동호회원인 CF파트의 N차장, 총무인 나 역시 N대리,
나머지 4명은 J이사, l이사, 그리고 운전기사인 K기사...
참가 총인원 8명에 4명이 본관이 같아 흡사 종친회의 모임 같은 기이한 출조가 되었다.
높으신 분을 모시도 함께 하는 출조이니 만큼 장소가 문제였다.
포인트를 잘 모르거나 자주 가 보지 않은 장소를 선택했다가 입질이 없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나중에 사장님과 이사님들 뵐 면목이 없는 것은 물론, 인사고과에도 그 여파가 있을지도...ㅎㅎㅎ
이렇게 해서 동호회장님이 고심(?) 끝에 결정한 출조장소는 경기도 안성에 위치한 고삼지.

한창 덥기 시작한 날씨였지만 그날 따라 비가 오지 않을 정도의 흐린 날씨여서 낚시하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근무를 끝내고 우리 일행은 동호회장님 댁에 들러 준비 한 짐을 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 고삼지에 도착,
미리 예약한 좌대로 올랐다.
8명이 올라타도 넓은 공간이 남아 도는, 축조한지 오래 되지 않은 넓은 좌대로 높낮이 조정도 완벽하게 해 놓아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우선 짐을 풀자마자 사장님부터 말단 총무에 이르기까지 낚시대를 펼쳤다.
나는 연안 쪽을 향해 2.5칸, 3칸, 3.5칸 세대에 바늘은 6호, 본줄은 3호 미끼는 지렁이와 떡밥을 달아 대편성 끝.
30여분이 지나면서 좌대의 여기저기서 입질이 감지되었다.
역시 장소를 잘 택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나도 오랫 만에 즐거운 낚시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사장님 앞에서 튀고 싶은 마음에 큰고기를 낚아보고 싶은 객기도 발동했다.
'사장님 앞에서 큰 고기 한번 낚아봐?'
그러나 물고기가 물어줘야 말이지...
서너시간 만에 10여수 안팍으로 낚고 있었다.
어쨌든 이 정도면 오늘의 조과는 그런대로 합격, 내일 아침 철수할 때까지의 예감은 좋았다.

좋은 예감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을까?
3칸반대의 찌놀림이 심상치 않다.
스멀스멀 한 마디 쯤 올라오는듯 마는 찌를 더 참지 못하고 순간 낚아챘는데...
이런...!
직감적으로 뭔가 큰놈이 물었구나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마치 커다란 바위에 바늘이 걸린듯 꼼짝도 않는다,
대를 세울 수가 없다.
3칸반대의 굵은 글라스롯드 대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바로 옆에 앉으신 J이사, 너무 놀라셨는지
도와주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구경만 하신다.
대를 세우지 못하자 그 긴 낚시대와 초릿대에 이어진 낚싯줄이 일직선이 되었다.
일직선이 되는가 싶더니 그 순간 낚시바늘에 걸린 물속의 괴물체(?)가 우에서 좌측으로 측으로 비잉~ 곡선을 그리며
이동하는 것이 아닌가?
고 있었지만 대가 세워지지 않기는 마찬가지.
이때였다, 드디어...
5미터정도 이동한 물속의 괴물체는 '팅'하고 속절없이 떨어져 나갔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넋나간듯 괴물체가 사라진듯한 물속을 응시하던 나의 귓전에 그제서야 들려온 J이사의 한마디.
"어따! 큰놈이 걸렸었는가 보네."
그제서야 좌대 위의 온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힘없이 달려 나온 낚시줄 끝의 채비는
바늘이 휘거나 부러지지 않은 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상도 하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잉어? 초어? 백연어? 그 당시 고삼지에서는 초어라든가 백연어가 낚였다는 소식은 없었으니 잉어가 아니었을까?
잉어라면 1미터는 훨씬 넘을 것 같았다.
이렇게 좌대 위에서 한바탕 소란을 겪고 우리는 저녁식사에 들어갔다.
N부장님이 집에서 하룻 만에 준비하신 8인분의 식사는 대단했다.
누렁이 수육에다 누렁이 무침, 그리고 누렁이탕...
누렁이를 주메뉴로 하는 식단은 야채와 과일까지 완벽한 준비 그 자체였다.
거기에 곁들이는 소주의 맛이란...
미확인 생물체와의 씨름으로 기운이 빠져 허탈한 나에겐 어느 산해진미보다 맛과 그 기쁨이 더 했다.

식사와 함께 술이 서너잔씩 돌며 식사가 끝난 사람은 일찌감치 다시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이제 식사하던 자리는
술자리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어두워져 찌 위엔 캐미라이트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으나 평소 직장내에서 자기와 비슷한 연배의 동료가 이미
부장으로 있는 N차장은 술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아예 사장님의 자리 앞에 앉아 사장님과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는데 술을 좋아하는 N차장은 어느정도 취기가
돌고 있었다.
사장님의 고향은 영남, N차장의 고향도 영남이었다.
두 사람 모두 평소 잘 쓰지 않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그 동안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얘기가 많았는지 사장님께 계속 무언가 얘기하고 있었는데 궁금한 나의 귀는 그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N차장 :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행님요!
사장님 : (N차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와 부르노?
N차장 : (사정조로) 행님, 나좀 잘 봐 주이소!
사장님 : ... (아무 말 없으시다.)
N차장 : 이제 잘 봐 주실 때도 되지 않았능교?
사장님 : (노한 목소리로) 이노마가...? 뭐라 카노! 일마 봐라?
N차장 : !!! (놀라서 뒤로 나자빠진다.)
사장님 : 니, 술 취했나? 칵! 차 삐릴라!!!

이게 웬일인가?
술자리를 빌어 기회를 포착, 무언가 자기의 진급문제 같은 관심사를 호소하려던 N차장의 야무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 시간 이후 사장님은 아무 일 없다는듯 밤낚시에 몰두하셨고 혼자 술을 더 마신 N차장은 그날 밤 숙취로 인해 낚시를
못하는 것은 물론 좌대위의 방가로에서 긴 잠을 잤다.
물위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잠에서 깬 N차장은 어제 밤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행 중 아무도 그에게 어젯 밤의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은 건지 모르겠다.
몇년 후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한 N차장은 회사를 사직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나 역시 그 회사를 나온지 꽤 오래 되었지만, 지금도 궁금한 그날 밤의 두가지...
과연 그날 밤 3.5칸대에 걸렸던 미확인 생물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날 밤 그 사건이 N차장이 진급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이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