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世上萬事)/세상 이야기

31년전, 어느 소대장의 소대 전입신고...

green green 2009. 2. 25. 17:50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얘기...
3위 : 축구얘기,
2위 : 군대얘기,
1위 : 군대에서 축구했다는 얘기.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
여자들이 싫어 한다는 군대와 축구얘기를 합친 것이니 오죽할까.
싫어하는 이유를 축구와 군대가 여자들이 잘 모르는 세계여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정작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남자들이 한번 시작하면 끝없이 나오는 얘기가 바로 축구와 군대 얘기라서 그렇단다. 세상에...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달라졌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축구는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운동경기가 되었으며
군대 얘기 역시 수년 전 28사단 김모 일병의 총기난사사건 이후 여자들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래서 군에서 병장으로 제대한지 30여년 넘는 green의 군대얘기도 끝이 없다.

오늘의 얘기는 본인이 현역으로 근무했던 부대에 부임한 소대장과 소대원간의 휴먼스토리...  

28사단 81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1분에서 유탄발사기 사수,

상병의 계급으로 군생활을 하던 1978년 여름...
민간인통제선 GOP 철책근무를 위한 부대이동을 수개월 앞둔 우리 소대에 새로운 소대장이 부임하였다.
그날 저녁, 식사후 내무반에서 저마다의 휴식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갑자기 나타난

완전군장 차림의 소대장은  우리에게 난데없는 비상을 걸었다.
우리에게도 완전군장 차림으로 중대 연병장에 집합할 것을 명했다.

이런, 아직 소대장과 인사는 커녕 일면식도 없었는데...

갑작스런 비상에 우리는 평소 훈련한대로 연병장에 집합, 군장검사준비를 완료하였다.
소대장은 선임하사에게 집합완료보고를 받은 후 이건 또 웬일?

우리소대원들에게 대대 연병장을 10바퀴 뜀박질(구보)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그것도 완전군장차린으로, 세상에...
그러나  이것이 군대!

영문도 모른 채 즉시 명령에 복종, 우리는 소대장의 구호에 맞춰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눌러 쓴 철모에 배낭에는 내용물을 규정대로 꽉 채워 메고 M79유탄발사기에 M16소총을

합하여 개조한 분대화기 M203 유탄발사기를 메고 달렸다.
생각해 보라, 한여름에 이렇게 달려야 하는 소대의 모습을...

그날 따라 대대연병장이 어찌 그리 넓게 느껴지던지...
비오듯 쏟는 땀은 팬티와 런닝, 속옷까지 푹 적셨다.

함께 뛰며 선창하는 소대장의 구호에 복창하며 이를 악 물고 우리는 뛰고 또 뛰었다.
너댓바퀴를 돌며 서서히 낙오하는 소대원이 생기자 우리는 그가 낙오하지 않도록 서로 짐을 나눠 메고

부축해 가며 드디어 10바퀴 다 돌았다.

서로 배려하고 도우며 달리는 이 과정에서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완주한 우리는 중대연병장에 집합,

무거운 군장을 풀었다.
그 길로 부대 밖의 시냇가로 재집결하여 땀이 흥건히 밴 옷을 훌훌 벗고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 된 몸을 씻었다.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깨끗한 몸으로 내무반에 들어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소대장의 부임인사...
이제 막 소대원과 함께 소대생활을 시작하는 신임 소대장은 이렇게 우리에게 전입신고(?)를 톡톡히 요구했다.

소대 전입신고가 있던 그날 밤,
솔선수범으로 함께 뜀으로써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사는 군인정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알았다.

 

그 더운 여름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땀흘려 무작정 뛰어야 했던 뜻을...
소대원들에겐 새로 부임하는 소대장이 처음에는 경계와 이질감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필수단계의 이 단계를 빨리 지날수록 소대는 건강해진다.

이 관계정립의 역학이 처음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소대장과 소대원의 사이는
가까와지기 어려우며 소대생활이 피차 힘들지 않을 수 없다.
띠리서 막강함을 유지해야 하는 소대의 전투력은 이로 인해 손실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보통 새로 부임한 신임 소대장보다 소대생활 많이 한 소대원들은 자신들이 더 고참이라는

비뚤어진 사고를 갖고 소대장과 기싸움을 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아는 초급 지휘관 신임 소대장은 직접 소대원과 함께 뛰는 강도 높은 연병장 10회 구보를 통해

소대원들의 기선제압은 물론, 전입신고를 훌륭히 해 냈던 것.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소대원을 장악할 수 있었던 슬기로운 소대장과 한 몸 된 우리는

그 해 초겨울 GOP 철책근무에 돌입하였다. 

외부세계와 철저히 단절되고 고립된 철책근무는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크고작은 사고가 항상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첫만남을 가진 소대장과 소대원들은 철책근무 끝나는 날까지

단 한 건의 불미스런 일이나 사고가 없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1978년 여름에 28사단 81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의 선봉으로 부임하여

소대원들에게 협동의 일체감과 하면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널어 주던 소대장,

그 소대장은 지금 별 두개의 대한민국 장성으로 육군 보병 55사단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내일(2009.2.26) 저녁 8시, 성남 아트센터에서 '님이시여' 합창 발표회가 있으시단다.